워치만 니의 저서 : 하나님의 복음
제 1 장 죄, 죄들과 죄인
이번 집회의 성질 -
복음을 가르침
오늘 저녁은 이번 성경 연구 집회의 첫 집회이다. 성경을 연구하기 전에 먼저 이번 집회의 성질에 대해 몇 마디 하고자 한다. 오늘 저녁에 혹시 처음으로 이곳에 오신 분이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처음 오신 분은 이 장소를 찾기가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문덕리 (집회가 열렸던 장소 이름)를 찾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지금 문덕리에 와 있고 이곳에 앉아 있는데도 집회를 마친 후에 집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를 모른다고 말한다. 모서리를 어떻게 돌고 몇 번을 돌면 자동차 가게 입구가 나오고 또 몇 걸음 가다가 모서리를 돌면 전차역 흑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당신은 이곳에 들어왔지만 어떻게 들어왔는지 말하라고 하면 자세하게 말할 줄 모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다. 그에게 주님을 믿었느냐고 물으면 믿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게 어떻게 주님을 믿었느냐고 물으면 그는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어떻게 주님을 믿었는지에 대해 분명치 않다.
그러므로 이번 집회는 부흥회가 아니요 전도집회도 아님을 기억하라. 이번 집회의 주제는 여전히 복음에 관한 것이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닌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왜 복음에 대해 가르칠 필요가 있는가? 이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자기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다루는 것은 당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오늘 우리가 하는 일은 당신에게, 애문의로(愛文義路)에서 어느 쪽으로 돌고 어떻게 자동차 가게 입구에 도착하며 또 자동차 가게 입구에서 어떻게 돌아야 문덕리에 도착하고 문덕리에 도착한 후 어느 쪽으로 몇 걸음 가야 집회소 창문 쪽에 도착하며 또 어느 쪽으로 가서 쓰레기통을 지나 집회소 문 앞에 이르러 집회 장소에 들어올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집회는 당신에게 이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유하는 집회가 아니라 어떻게 이 안으로 들어오는지를 알려주는 집회이다.
만일 여러분 중 아직 주님을 믿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아마도 이번에 실망할 것이다. 이번에 우리는 주님을
이미 믿은 사람에게 그들이
어떻게 믿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 모인 것이다. 어떤 형제 자매들은
복음에 대해 매우 분명하므로 이것들을 잘 알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축복하사 새로운 빛을 우리에게
주시기 바란다. 이번 집회는 이미 주님을 믿었으나 자기가 주님을
믿은 것을 모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성경 연구 집회이다. 이번에 내 목적은 여러분을 격려하거나
부흥시키는 데 있지 않고 진보케 하는 데 있다. 환언하면, 이번에
우리는 다름 아닌 안내자의 일을 하고자 한다.
죄, 죄들과 죄인
복음에 관하여 아주 낮은
방면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하겠고, 매일 저녁
한 걸음씩 전보하기 바란다. 첫날 저녁에는 우리가 빠뜨려 놓을 수
없는 주제 곧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제목인 죄, 죄들과 죄인에 대해 언급하겠다. 성경은 죄의 문제를 매우
중시한다. 이는 죄 문제를 분명히 볼 때 만이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알려는 사람은 죄가 무엇인지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어떻게
죄가 우리를 만졌고 우리가 어떻게 해서 죄인 되었는가를 먼저 본
다음에야 하나님의 구원을 분명히 볼 수있다. 그러므로 오늘 저녁 우리는 모든 사람이
「삼자경」을 읽듯 죄가 무엇이고 죄들과 죄인이 무엇인지를 먼저
보아야 한다.
죄와 죄들의 차이
우리는 아주 쉽게 죄와 죄들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죄는 단수이고 죄들은 복수이다. 우리는 죄와 죄들의 차이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죄와 죄들을 구분할 줄 모른다면, 당신은 구원에 대하여도 분명치 않을 것이다. 죄와 죄들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았을지라도 자기의 구원 여부에 대해 분명하지 못하게 된다. 성경에서 죄란 무엇이고 또 죄들이란 무엇인가? 간단한 정의를 내리겠다. 죄는 당신으로 범죄케 하기 위해 당신 속에서 당신을 지배하는 능력이고, 죄들은 밖으로 범한 낱낱의 죄들을 가리킨다.
죄란 무엇인가? 나는 죄의 뿌리, 죄의 근원 혹은 본죄, 원죄 등의 명사를 쓰기 원치 않는다. 이 명사들은 다 신학자들이 지어낸 것들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단순한 것이 좋다. 여기서 우리는 체험에서 이것을 보기로 하자. 우리 속에서 우리를 사욕과 정욕의 길로 향하도록 강요하고 그런 자연적 경향을 갖도록 우리를 지배하고 강요하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한 죄이다. 그러나 우리 속에 우리를 강요하고 재촉하는 죄가 있을 뿐 아니라 밖으로 행한 낱낱의 죄들이 있다. 성경에서 죄들은 행위에 속하고 죄는 생명에 속한다.
죄들은 우리의 손과 발과 마음 곧 우리 온 몸으로 행한 바이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바 몸으로 행한 일들이다. 그러나 죄는 어떤가? 죄는 우리의 육체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일종의 율이다. 항상 우리로 범죄하고 악을 행하게 하는 이것이 바로 죄이다. 우리가 죄와 죄들을 잘 구분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는 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완전히 보여준다. 이 여덟 장의 성경에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은 1장부터 5장 11절까지에서는 죄 (sin)에 대해 말하지 않고 죄들(sins)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2절부터 8장까지에서는 죄들이 아닌 죄를 보여준다. 로마서 1장부터 5장 12절까지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로마서 5장 12절 이후는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의 어떠함 곧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죄는 우리의 생명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로마서 5장 11절 이전에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다. 이는 거기서의 문제가 당신이 살아나야 할 필요성에 있지 않고 당신이 범하는 낱낱의 죄가 어떻게 사함받을 수 있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5장 12절 이후의 둘째 단락에서 당신은 당신 속에서 강하고 힘센 어떤 것이 당신 몸의 지체의 율로서 당신을 끌어당기고 범죄케 함을 볼 수 있다. 이것에 대하여 당신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죄들은 우리의 행위이기 때문에 성경은 죄들이 사함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죄는 우리를 유혹하고 범죄케 하기 위해 억압하고 강요하는 것으로서, 이 죄에 대해서는 해방될 필요가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한 번은 어느 선교사를 만났는데, 그는 대화하는 중에 죄 사함(the forgiveness of sin)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서 성경 어디에 죄 사함(the forgiveness of sin)이라는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주 많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한 군데만 보여달라고 말했다. 그는, 『당신의 말은 없다는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 전권에 죄 사함(the forgiveness of sin)이라고 말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죄들의 사함(the forgiveness of sins) 이라고 말했습니다. 사함받는 것은 죄들이지 죄가 아닙니다. 』 라고 말했다. 그는 내 말을 믿지 않고 성경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는 내게, 『니 선생, 참 이상하군요. 성경에서 죄들의 사함을 말할 때마다 복수를 표시하는「S」를 붙였군요.』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함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죄들임을 볼 수 있다.
죄들은 우리 밖의 것이기 때문에 사함이 필요하다. 또 하나 당신 안에 강하고 힘세며 당신으로 범죄하도록 재촉하는 그것은 사함이 필요치 않고 다만 그것을 벗어나면 된다. 당신이 그것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그것과 관계를 갖지 않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죄들은 사함으로 해결되며 죄는 그 권세 아래 있지 않고 그것과 관계를 맺지 않음으로 해결된다. 죄들은 우리의 행위이고 낱낱의 행한 바이기 때문에 사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죄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한번도 죄의 사함을 말한 적이 없고 항상 죄들의 사함을 말한다. 동시에 죄들로부터 해방받아야 한다고 말한적이 없다. 나는 성경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음을 보장할 수 있다. 성경에는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있을 뿐 죄들로부터 해방된다는 말이 없다. 왜 그런가? 당신 속에서 당신을 억압하고 이끌어 범죄케 하는 그것에 대하여 당신은 다만 거기서 벗어나고 해방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성경에서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여기서 나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비교하여 제시 해보겠다. 성경에서 죄는 육체 안에 있고 죄들은 행위에 속한다고 말한다. 죄는 우리 몸에서 원칙 (생명의 원칙)이고 피들은 우리 몸에서 사실(생명의 사실)이다.
죄는 지체 안에 있는 법이고 죄들은 사실적인 범죄요 실지로 행한 바이다.
죄는 우리의 어떠함과 관련되고 죄들은 우리의 행함과 관련된다.
죄는 우리의 어떠함에 속하고 죄들은 우리의 행함에 속한다.
죄의 범위는 생명의 범위이고 죄들의 범위는 양심의 범위이다.
(죄는 생명의 능력이고 죄들은 양심의 능력이다. 당신은 생명 안에서 죄의 지배를 받고, 밖으로 당신이 많은 죄들을 범할 때 양심 안에 참소와 불안함이 있게 된다. )
죄는 합일적인 것이고 죄들은 낱낱의 것이다.
죄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고 죄들은 하나님앞에 있는 것이다.
죄는 해방을 필요로 하고 죄들은 사함을 필요로 한다.
죄는 성화와 관련되고 죄들은 칭의와 관련된다.
죄의 문제는 승리의 문제이고 죄들의 문제는 마음 속의 평강의 문제이다.
죄는 사람의 천성 안에 있는 것이고 죄들은 사람의 길에 있는 것이다.
비유로 말하자면, 죄는 나무와 같고 죄들은 나무에 달린 열매와 같다. 많은 경우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죄인을 빚진 사람에 비유한다. 우리는 빚을 지는 것이 아주 좋지 않은 일임을 알 것이다. 그러나 빚을 진 사람에게 있어서 빚을 진 것이 하나의 문제이나 그의 속에 빚을 지는 성질이 있는 것도 하나의 문제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빛을 지다 보면 남의 돈을 빌어 쓰고서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남에게 빛을 질 수 없고 남에게 돈을 빌 수 없다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누구에게서 이삼백 원 또는 이삼천 원을 빌렸는데 나중에 갚을 능력이 없어서 친척이나 형제 혹은 친구나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 그 빛을 갚아 주었다 하자, 그런데도 삼사 일 후에 또 속으로 남에게 빌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당신은 돈을 비는 것과 빌고자 하는 마음은 별개임을 볼 수 있다. 밖에서 비는 것은 성경에서 말한 죄들과 같다. 당신의 습관과 성질은 걸핏하면 돈을 빌려고 하는데, 그러한 돈을 빌려는 마음은 죄인 것이다. 그는 누가 빚을 갚아주었다고 해서 돈을 비는 일을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빚을 갚아주는 사람이 있으므로 더욱 돈을 빌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범죄(범죄한
사실)를 처리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 속의 죄로 향하는 마음도 처리하신다. 우리는 죄들의 처리가
중요할 뿐 아니라 죄의 처리도 중요함을 본다. 우리가 이 두 방면을
보아야만 우리의 구원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가 죄인인가
이제 우리는 누가 죄인이냐는 질문을 하겠다. 오늘 여기에 있는 형제 자매들 중에서 어떤이는 주님을 믿은 지 20 년이 되었고 어떤 이는 15 년이 된 것을 안다.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질문한 것은 「인간의 시작」(人之初:삼자경의 첫 어구) 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체 어떤 사람이 죄인인가? 나는 많은 사람들이 범죄한 사람이 죄인이라고 답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웹스터 대사전을 찾아본다면 범죄한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한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성경을 읽어본다면 당신은 그 풀이를 제해버릴 것이다. 「범죄한 사람이 죄인」이 아 니라 「죄인이 범죄하는 것이다. 」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 가운데 많은 형제 자매들이 로마서를 읽어 보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 사람이 죄인인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바울이 3장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한것을 들었으리라 믿는다. 하나님이 의인을 찾으신다면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깨닫고 그분을 구하는 이를 찾았지만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하셨다. 사람은 다 거짓말장이요 바른 길을 떠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이다. 조심하라! 말을 속단하지 말라. 로마서 3장에서 죄인에 대해 말했는가? 만일 로마서 3장에서 「죄인」이라는 단어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할 것이다. 누가 찾아낼 수 있는가? 로마서 3장에는 「죄인」이라는 단어가 없음을 기억하라. 어떤 사람은 로마서 3장이 사람의 범죄를 말하기 때문에 사람이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죄인을 말하는 장은 로마서 3장이 아닌 5장이다. 그러나 다음 사실을 구분하기 바란다. 로마서 3장은 범죄 문제를 말하고, 5장은 죄인의 문제를 알려준다. 로마서 3장은 다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고, 로마서 5장에 이르러서야 어떤 사람이 죄인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담으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이것은 로마서 5장 19절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이다. 만일 누가 다비의 새 번역 영어 성경을 갖고 있다면, 「죄인이 된 것은」이라는 말을 그가 「죄인들로 조성된 (have been constituted sinners) 것은」이 라고 번역한 것을 볼 것이다. 영어단어 「constitution」는 「조성」이라는 뜻이다. 우리 모든 사람은 조성에 근거하여 죄인이다. 이력서를 쓸 때 필수적으로 적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본적이고 다른 하나는 직업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의 본적은 죄인이고 우리의 직업은 범죄하는 것이다. 우 리의 본적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하든 범하지 않든 우리는 죄인이다.
이번에 광주에서 형제들과 성경 공부를 할 때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 종류는 범죄한 죄인이고 다른 한 종류는 도덕적인 죄인이다. 범죄한 죄인이든 도덕적인 죄인이든 다 죄인이다. 하나님은 아담으로부터 난 자는 다 죄인이라고 하신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아담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이라면 당신은 죄인이다. 만일 당신이 범죄했다면 당신은 범죄한 죄인이라 불리우고, 범죄하지 않았다면 더 정확하게 말해서 적게 죄를 범했다면 당신은 도덕적인 죄인 혹은 죄를 적게 지은 죄인이라 불리우게 된다. 만일 당신이 고상한 사람이라면 당신은 고상한 죄인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성결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성결한 죄인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지 죄인이다. 오늘 사람들은 범죄한 사람만이 죄인이고 범죄치 않은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는 큰 과오를 범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당신이 범죄하든 범죄하지 않든 당신이 사람이라면 죄인인 것이다. 당신이 아담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죄인인 것이다. 사람은 범죄함으로 죄인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범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들이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죄인인 것이다. 우리는 죄인이 될 필요가 없다. 한번은 진 형제님과 대화하는데 그 앞에 보온병이 있었다. 그는 내게 『이것은 보온병인데 만일 이것이 보온병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어찌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보온병이기 때문에 보온병이 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당신이 이미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죄가 사함받을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임을 기억하라. 우리는 자신을 사함받은 죄인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더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믿는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면 마치 복음을 모르는 사람같이 여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바울은 자신의 죄가 사함받지 알았다고 말한 적은 없으나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한 적은 있다. 당신은 이것들의 차이를 볼 수 있는가? 만일 당신이 바울에게, 『바울 형제님, 당신의 죄가 사하여졌나요?』라고 묻는다면, 그는 겸손한 체 하면서 『죄 사함을 받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죄인이라고 겸손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가 자기 몸에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를 뒤집을 수 없듯이 아담 안에 있는 그의 위치도 뒤집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은혜를 받았지만, 죄를 제거하는 것은 오늘 하나님이 아직 이루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죄인인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러서야 죄의 문제가 완전히 처리될 수 있다. 이것은 완전한 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이것에 대해서는 며칠 후에 다시 보기로 하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라는 이 사실은 분명하고 정확히 보아야 한다. 당신은 범죄하든 하지않든 사람이라면 죄인인 것이다. 복음을 들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얼마나 범했는가와 죄를 아주 조금 범한 것으로 다툰다. 그러나 하나님 면전에서는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아담 안에 있느냐의 문제밖에 없다. 아담 안에 있다면 당신은 죄인이다. 만일 죄인이라면 그 사실 하나로 족하다. 그럼 왜 로마서 1,2,3장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많은 죄들을 범하것을 알려주는가? 이 몇 장들은 죄인이라면 범죄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로마서 앞의 3장은 범죄로써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로마서 5장은 죄인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번 여행 중 어느 날 밤 강서(江西)의 길안(吉安)이라는 곳에서 경찰의 일을 하는 한 형제를 만났다. 그는 내가 주님의 일을 하는 전도자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곧 내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그가 믿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증거를 보여주어야 했다. 나중에 많은 증거를 보여주자 그는 나를 믿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벌써부터 죄인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우리가 죄인이라는 증거가 없었던 것 같다. 로마서 앞의 3장은 당신이 죄인인 것을 증명해준다 당신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근거를 찾아내어 보여준다. 5장은 당신이 죄인이라고 말한다. 앞의 세 장은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한 가지 일을 더 말하겠다. 복건(福建)에는 과거에 강도요 유괴범이었다가 기독교 교우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 비록 그들이 강도짓을 하였으나 그래도 양심은 조금 있었다. 목사나 전도사를 붙잡았을 때에는 돈을 요구하지 않고 그냥 돌려 보냈다. 그러자 붙잡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교회의 목사 또는 전도사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그들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그것은 곧 누가 자신을 목사라고 하면 십계명, 주기도문, 팔복(八福) 등을 외워 보게 하는 것이었다. 외울 줄 아는 사람은 목사로 여기고 돌려보냈다. 처음에 이것을 들었을 때 나는 매우 흥미롭게 느꼈다. 목사인가 아닌가에도 증명이 필요하다니, 강도는 잡힌 사람에게 그들이 목사인지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이 죄인인가를 증명해 보여주신다. 만일 증거가 없다면 당신은 자신이 어쩐 사람인지를 잊어버릴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로마서 1,2, 3장은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많은 죄들을 나열하였다. 당신이 많은 죄들을 범한 것은 당신이 죄인임을 증명해준다.
그러므로 오늘 저녁 당신은 그런
죄들이 있어야 죄인이라고 잘못 생각하지
말라. 그렇지 않다. 당신은 벌써부터 죄인이었다. 그러한 죄들이
있은 후에야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초를 분명히
닦아 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길에 나가서
혹은 사람들 집에 가서 각 사람의 손을 붙들고,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사람을 죽인 적이 없고 불을 지른 적도
없는 그가 어찌 죄인이냐고 말할 것이다. 당신은 그에게,
『좋습니다. 당신은 강도짓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은 죄인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만나든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단정할 수 있다.
신약 성경 전체에서 오직 로마서 5장 19절만이 누가 죄인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신약 성경 다른 곳에서는 죄인이 어떤 일을
하였는가를 말해주나 오직 이 곳에서만은 누가 죄인인가를
알려준다. 죄인은 수천만 가지의 일을 저지를 수도 있고 한 가지
일도 저지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담에게서 난 자는 다 죄인인 것이다.
가장 큰 죄
우리는 죄, 죄들과 누가 죄인인가를 보았다. 우리의 본적은 죄인이고 우리의 행함은 죄인의 본적에 합당하다. 우리는 죄인이고 행한 모든 것은 죄인에게 합당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자기 「죄」를 가리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군자」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죄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무죄한 사람으로 가장했을 뿐이다. 우리의 본적은 죄인이고 우리의 직업과 행함은 범죄이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범죄하였기 때문에 죄인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범죄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죄를 범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늘 저녁 이 자리에는 서양에서 오신 몇몇 친구분들이 계신다. 아마 여러분들은 상해말을 할 줄 알 것이다. 상해 사람은 다 상해말을 할 줄 안다. 그러나 상해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해서 다 상해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힘써 상해말을 배우지만 그는 상해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상해말을 할 줄 모르는 상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상해말을 할 줄 모른다고 해서 상해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가 상해 사람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상해말을 할 줄 모르는 상해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상해 사람 중에 상해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일반적으로 상해 사람은 다 상해말을 할 줄 안다. 만일 그가 상해 사람이고 상해말도 할 줄 안다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죄인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죄 짓는 생활을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죄인이 범한 죄들을 말할 때, 오늘 저녁 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죄의 목록을 만들어내기를 원치 않는다. 오늘 저녁 나는 다만 사람의 죄를 증명하기 위해 몇 가지만을 언급하겠다. 신약과 구약 성경에서 특별히 주의하는 몇 가지 죄가 있다. 구약에서 특별히 주의하는 한가지 죄는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신약에서 특별히 주의하는 죄는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람이 정죄되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분노를 격동케 하는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이 살인하고 불을 지르고 간음하고 교만하고 놀고 먹으며 도박하는 등 사람들에게 고할 수 없는 더러운 죄들을 범했기 때문에 당신이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성경에서 중요시하는 것들이 아니다. 성경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문제가 있는 것을 중요시한다. 율법의 총강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당신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사람을 죽이거나 불을 지르는 데 있지 않고, 당신의 정욕이 어떻고 생각이 어떻고 말이 어떤가에 있지도 않다. 문제는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가에 있다.
많은 죄들 중에 다른 죄들을 가져오고 다른 죄들로 뒤따르게 하는 우두머리 죄가 있다 성경은 죄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 왔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한 사람이 범한 죄가 어떤 죄인가를 물어야 한다. 간음인가? 도적질인가? 살인인가? 불을 지르는 것인가? 에덴 동산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오늘 이 세상에 흉악하고 더러운 일들과 사람을 놀라게 하는 일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그 때의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것이다. 그런데 대체 당시에 아담은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아담은 살인하지 않았고 간음하지 알았으며 흉악하고 더러운 일들을 범하지도 않았다. 아담이 저지른 죄는 아주 깨끗하고 청결했다. 그 때 아담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지 않고 남겨 둔 것이 한 가지 있다고 생각했고 그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담이 범한 죄는 그와 하나님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담이 자기 위치에 서기를 바라셨지만 그는 하 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이 그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그는 의심을 품었고 문제를 가졌다. 그 때 아담은 그렇게 많은 죄들과 관련되지 않았다. 당시 아담은 도박하지 않았고 길거리를 다니면서 좋지 않은 것을 보지 않았으며 좋지 않은 책을 읽지도 않았다.
그 때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과 문제가 생긴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때문에 나중의 많은 죄들이 뒤따라왔다. 아담의 범죄로 각색의 죄가 들어왔다. 죄가 각기 종류대로 함께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이 처음에 범한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 그 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구약의 유일한 문제가 생긴 죄였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사람에게 문제가 있었고. 에덴 동산 밖에서는 형이 동생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각종 죄들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우리가 상상하듯이 심각하고 더러운 죄로 시작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성경은 죄가 아주 깨끗한 죄로 시작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실상 처음에 시작된 그 죄가 가장 심각한 죄이다. 그 죄는 바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문제가 생긴 것이 었다.
신약에 이르러서 당신은 주 예수님이 계속해서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고 말씀한 것을 볼 것이다. 아마 신약 오십여 군데에서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멸망하는가? 살인한 사람이 지옥에 내려가는가? 간음한 사람이 멸망하는가? 생각이 부정하고 행위가 올바르지 않은 사람이 멸망하는가? 아니다. 요한복음은 재삼 우리에게 믿지 않는 자는 정죄되었다고 말한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노하심이 항상 그 위에 있다. 주 예수님은 또 성령이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말했다. 무슨 죄 때문에 책망하는가? 당신이 요 며칠간 극(劇)을 보았기 때문인가? 당신이 요 며칠간 도박했기 때문인가? 당신이 살인했기 때문인가? 불을 질렀기 때문인가? 아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요 16:9).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더러움을 죄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죄로 여기시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는 데 있다. 주님은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정죄를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많은 죄들을 범하는 이유는 주 예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사람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잃었기 때문에 허다한 죄를 범했다. 신약에서 사람은 주 예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허다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오늘 저녁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중에서 아마 어떤 사람은 마음 속으로, 『당신이 나를 죄인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허다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 』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를 범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주님을 믿지 않는 죄를 범한 적이 없다고 말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와 그 아비가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재산을 다 허비하였다. 그러나 탕자는 언제부터 탕자이었는가? 그가 먼 나라에서 호주머니 속에 돈이 많고 생활이 넉넉할 때에는 탕자가 아니었는가? 그가 재산을 다 허비하고서 돼지를 치며 배고파할 때라야 탕자였는가? 내가 말하지만, 아버지를 떠난 그 날부터 그는 이미 탕자였다. 그가 재산을 다 허비하기 전에도 이미 탕자였다. 그가 탕자 된 때는 재산을 다 허비하고서 돼지를 치며 쥐엄열매를 먹고 옷이 낡아지고 배가 고플 때가 아니라 아버지 집을 떠날 때인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묻겠다. 만일 그 작은 아들이 먼 나라에 가서 재산을 허비하지 않고 도리어 돈을 벌었다면, 혹은 장사하여 큰 돈을 벌어서 심지어 그의 소유가 아버지의 소유보다 더욱 많다면 그가 탕자가 아니겠는가? 아니다. 그는 여전히 탕자이다. 아버지의 눈에서 볼 때 그는 탕자이다.
오늘 우리는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 제해야 할 가장 잘못된 생각이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즉시 죄인 되었다. 설령 그의 도덕성이 남보다 열 배나 더 선하다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을 떠났다면 그는 이미 죄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되고서 밖의 일들 곧 기도하고 성경 읽고 집회에 참석하며 모든 행실을 전과 똑같이 행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문제가 있다면 당신은 범죄한 것이다. 처음 사랑을 잃었다면 모든 것 이 문제 있는 것이다. 탕자는 어떤 사람인가? 재산을 다 허비한 때라야 탕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비 집을 떠난 날부터 그는 탕자였던 것이다. 그가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그는 탕자인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돈을 번 탕자는 하나도 없다. 탕자는 돈을 잃고 모든 재산을 허비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이 그로 재산을 다 허비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과 그가 어떤 상황에 있든 죄인이 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 죄인의
자격을 가졌고 어떻게 죄인이 되었는지를 보았다. 우리가 죄인 된
것은 우리가 죄와 관계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범죄하는 이유는
우리가 죄들과 관계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에는 차이가 있다.
내가 아담으로부터 태어났고 죄의 권세 아래 복종하였기 때문에
죄가 내 생활의 원칙과 생명의 원칙이 되어 나는 죄인이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밖으로 내게는 낱낱의 죄가 있기 때문에 나는
범죄자이다. 범죄는 죄들과 관계 있고 죄인은 죄와 관계 있다.
다른 죄들
이것은 다른 죄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에는 다 형벌이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다른 많은 죄들이 산출되었다. 신약의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으므로 자연히 많은 죄들이 산출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주님을 믿지 않는 이 두 가지가 가장 주된 죄이다. 여기에서 불의와 사악함과 타락함과 시기와 살인과 경쟁과 간사함과 미움과 훼방과 수군수군함과 하나님을 미워함과 사람을 욕함과 오만함과 자랑함과 악한 것을 꾸며냄과 부모를 거역함과 무지하며 배역함과 무정함과 남을 불쌍히 여기지 않음과 자기만을 돌봄과 돈을 사랑함과 배은망덕함과 마음이 부정함과 성품이 흉악함과 선한 것을 사랑하지 않음과 주님과 친구를 파는 것과 조급함과 자고함과 쾌락을 사랑함과 경건의 외모는 있으나 경건의 실제는 없는 등의 다른 많은 죄들이 산출되었다. 이 죄들은 사람이 범한 가장 중요한 죄 는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들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런 죄들이 발생하는 이유가 그 주된 죄에 있음을 모른다. 오늘날 죄인들 가운데서나 교회 가운데서 사람들은 이런 죄들을 처리하는 것만 선포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법률상 유죄인가 무죄인가의 문제이다.
개인으로 말한다면 성경은 우리더러 「죄」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하지 앉고 「죄들」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죄과의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고 우리가「죄들」을 범할 때만이 하나님 앞에서 죄과의 책임을 지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우리더러 죄의 책임을 지라고 하지 않는다(요일 1:8). 도리어 성경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가 우리를 사하실 것이라고 말한다(요일 1:9). 여기서 우리는 죄들은 마땅히 우리가 담당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죄들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죄과가
있다. 죄과가 있을 때 형벌의 문제가
야기된다. 형벌의 문제가 있을 때 양심의 불안이 있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죄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저 정죄된 사람이 되게 한다 죄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노하심의 나타남을 기다리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함을
얻어야 양심에 평강이 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죄들만 해결되고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여전히
죄들이 생기고 죄과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들을 사하신 후 또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셔야 한다.
죄와 죄들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
당신이 구원받았을 때 죄의 악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고서도 당신은 죄들이 악하다는 느낌을 가졌을 뿐이다. 당신이 갓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당신으로 하여금 마음에 괴로움을 느끼게 한 것은 죄들이지 죄가 아니다. 그 때 당신을 괴롭게 한 것은 죄들이지 죄가 아니다. 가령 당신이 구원을 받고 나서 거짓말하고 구원을 받고나서 화를 내며 질투하며 교만하다 하자. 혹 당신의 부주의로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망가뜨려 놓았다 하자. 당신은 이런 한 가지 한 가지 일들이 당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낱낱이 자백하며 그분의 사하심을 구할 것이다. 『하나님, 오늘 저에게 또 문제가 있습니다. 죄를 범했으니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 어제 당신은 좋지 않은 일을 열 두 가지나 행한 후에 마음에 괴로웠는데 오늘은 두 가지 밖에 행하지 않았다면 마음 속으로 즐거워하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은 많은 죄를 범하지 않았고 당신 몸에서 죄들이 줄어들었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말하거니와 이것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초기 단계의 상태이다. 이 때 당신은 당신의 죄들에 대해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서 몇 년이 지났을 때, 당신은 당신을 괴롭히고 저지하는 것이 죄들이 아닌 죄라고 느낄 것이다. 나중에 당신은 이러한 행한 일들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사람의 어떠함이 문제임을 발견한다. 당신이 행한 일이 나쁜 것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사람이 나쁜 것이다. 당신은 겉에서 당신이 행한 일만 보는데, 사실은 당신 자신이 악한 것이다. 당신 안에 당신으로 하여금 범죄케 하는 자연적인 원칙이 있다. 겉에서 행한 각종 일들은 교만이라고 칭할 수 있고, 질투, 더러움 등 여러 가지로 칭할 수 있다. 당신은 겉으로 많은 종류의 죄들을 가지고 있지만, 당신 안에는 죄를 좋아하는 어떤 법과 어떤 존재가 있다. 당신 속에는 당신으로 하여금 죄를 향하게 하는 뜻과 밖의 죄들을 향하게 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 밖의 죄들은 낱낱의 것들이기 때문에 성경은 복수를 사용했다. 교만이 한 가지 죄요, 거짓말, 간음도 각각 한 가지 죄이다. 교만은 살인과 같지 않고 거짓은 간음과 같지 않다. 그러나 당신 속에서 당신으로 하여금 죄를 향하도록 당신을 지배하고 유혹하는 것은 오직 한가지 뿐이다. 당신이 죄를 범하는 이유는 당신 속에 밖의 죄 향하게하는 한 법이 있기 때문이다. 이 죄는 성경에서 단수로 되어 있다. 이 죄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우리의 성품을 가리킨다. 이 죄는 우리의 천성 안에 있다. 우리는 이 죄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
세상 사람에 대해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방법은 완전한 것이므로 그분은 우리를 죄들로부터 만이 아니라 죄로부터도 구원하셔야 한다. 만일 우리를 죄들로부터 구원하실 뿐 죄로부터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완전한 것으로 여길 수 없다. 우리 몸에 죄와 죄들 이 두 가지가 있으므로 우리에게는 두 방면의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한면으로 죄들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고 또 한면으로 죄로 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이후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이 어떻게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 죄들과 죄로부터 우리를 구 원했는지를 조금씩 보기로 하자.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기로 하자.
죄들은 한 그루 나무의 열매처럼 낱낱의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백 개나 이백 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죄들」이다. 죄는 나무 자체이다. 오늘 죄인인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열매뿐이다.
당신은 당신의 열매가 좋지 않다는 것을 보았을 뿐 나무 자체인
당신 자신이 좋지 않다는 것은 보지 못했다. 당신의 열매가 좋지
않은 이유는 나무인 당신 자신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하나님은 죄도 이와 같다는 인식을 갖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분은 처음에는 당신에게 낱낱의 죄들을 보여주시고 나중에 가서는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
처음에는 당신의 범죄로 인하여 사함이 필요했는데, 한동안이 지날
때 당신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죄의 세 방면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의 세 방면 혹은 죄의 세 범주를 보여주신다. 첫째로 죄는 하나님 앞에 있고, 둘째로 죄는 양심 안에 있으며, 세째로 죄는 육체 안에 있다. 전 성경은 죄에 대해 일관성 있게 이 세 노선을 보여준다. 이것은 마치 세 줄기의 물이 합류하여 하나의 강으로 흐르는 것과 같다. 죄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갖기 위하여 당신은 이 세 노선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죄가 있고 양심 안에 어떻게 죄가 있으며 육체 안에 어떻게 죄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이 세 노선에 대해 분명치 않 고 분별하지 못한다면 죄에 대한 문제가 결코 분명해질 수 없게 된다. 만일 이 세 노선을 섞어 놓는다면, 당신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어떻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얼마나 완전한지를 알 수 없다. 만일 그 필요성을 인식한다면 그런 대응이 얼마나 옳은 것인지를 알게 된다. 만일 당신이 그런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러한 대응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죄를 알아야만 하나님의 구원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고 우주 행정의 최고 통치자이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 일정한 율법과 규정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실에 따라 갚으시고 보응하신다. 하나님은 통치자의 위치에서 온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신다. 아담의 때에 그런 명칭은 없었으나 실지로 아담의 율법이 있었다. 노아 이후에도 그런 명칭은 없었으나 노아의 율법이 있었다. 모세 이후에야 비로소 율법이라는 명칭이 생겨났고 그 때부터 정해진 율법이 사람 앞에 놓여졌다. 모세 이후의 정해진 율법에서든 모세 이전의 정해지지 않은 율법에서든 하나님은 죄를 범한 사람은 반드시 죽도록 규정하셨다. 하나님은 만일 사람이 율법을 어겼다면 형벌을 받아 영원히 죽도록 규정하셨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육체는 살았지만 그의 영은 이미 죽은 것이다. 결국 사람의 육체도 죽게 된다. 영원 안에서 사람의 영과 혼과 몸은 다 죽게 된다. 만일 사람에게 죄가 없다면 하나님은 형벌을 내리시지 않고 죄가 있다면 형벌을 내리신다. 사람의 범죄에 대해 그분은 조항을 갖고 계시며 율법을 갖고 계신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죄가 발생할 때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 죄안(罪案-범죄 조항:역자 주)이 있게 된다. 가령 요즘은 차를 몰고 다니다 함부로 길 옆에 주차시킬 수 없다.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임의로 주차시킬 수 있었다. 그 때에는 차를 도로의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아무데나 주차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달 전에 교통부에서 임의로 주차하는 것을 금지했다. 만일 당신이 도로 왼쪽에 차를 주차시킨다면 다른 차량들이 반대 방향으로 주차된 것을 볼 것이다(당시 교통법규에 따르면 차를 길 왼쪽에 주차시켜야 했다). 그러나 이제 차를 도로 변에 주차시킬 때 앞의 방향으로 주차시키라는 새 법이 규정되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법을 어기게 된다. 만일 오늘 한 형제가 차를 몰고 오다 합동로(집회소 앞의 도로명임) 옆에 잘못 주차시키고 이 집회에 왔다 하자. 교통부의 차량조사반 직원이 이것을 보았다면 교통부에 즉시 한 안건(案件)이 기록되게 된다. 당신이 이것을 알든 모르든 그 안건은 도로에 있지 않고 교통부에 올라가 있다. 사건은 합동로에서 발생하였으나 안건은 정안사(靜安寺) 순찰사무실에 기록 되어 있다.
죄의 역사는 사람에게 있다. 그러나 일단 사람이 범죄하면 하나님 앞에 죄안(罪案)이 있게 된다. 하나님은 세상의 통치자로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생명의 역사 안에서 만일 우리가 율법을 어긴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죄가 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는 거듭 「여호와 앞에서 내가 득죄하였다」,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다」는 말씀이 있다. 죄의 사실이 무섭고 두려운 이유는 일단 죄를 저지르면 죄안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죄에 대한 형벌을 집행하지 않으실 수 없다. 죄안이 이미 발생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벗어날 길이 없다. 두번째 방면에서, 하나님 앞에서 죄안이 발생한 것을 당신이 모른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마 당신은 앉아서 웃고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모른다면 아무 일도 없는 양 이런저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알고서 죄를 범한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죄가 당신의 양심 안으로 들어간다. 본래는 그 죄가 하나님 앞에 있었지만 이제는 당신의 양심 안에서 그것을 보게 된다. 양심은 무엇인가? 양심은 창문이다. 하나님의 빛은 양심의 창문을 통해 비취는 것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빛이 당신 안에 비췰 때 당신 안에는 불안감이 있고 잘못을 알게 된다.
오늘 저녁 이 자리에 앉은 당신이 차를 잘못 주차하였다 하자. 본래 이것을 몰랐을 때에는 아주 기뻤는데 이제 내가 말할 때 당신은 속이 편치 않을 것이다. 나의 이 몇 마디가 교통부의 죄안을 당신 안 으로 운반한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움직인다. 당신에게 지식이 없어서 알지 못한다면 당신 속의 양심은 아무 어려움 없이 평안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에게 지식이 있어서 하나님의 관점을 조금 보았다면, 당신에 대해 율법이 가지고 있는 관점을 보았다면 당신의 양심은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양심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양심은 닫혀 있기 때문에 빛이 그 안으로 투시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의 양심은 부엌 유리창처럼 기름이 두껍게 끼어 있다. 그 뒤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는 볼 수 있지만 누구인지는 볼 수 없다. 당신의 양심 안에 하나님의 빛이 비췰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고 즐거워한다. 그러나 당신이 복음을 듣고서 죄를 보고 하나님 앞에서의 당신의 위치를 보며 하나님 앞에서의 당신이 죄안을 안 후에는 당신의 양심에 문제가 생기고 괴롭고 불안하며 양심에 참소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하여야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통과될 수 있는지를 보게 된다. 무엇을 하여야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보게 된다.
기묘한 사실은 양심은 잠을 잘 뿐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의 양심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당신의 양심은 죽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의 양심은 잠을 잔다. 다만 어떤 사람의 양심은 너무 늦게 깨어나 더이상 믿을 기회가 없고 구원받을 기회가 없다. 양심을 아무렇게나 지나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어느 날엔가 양심은 당신을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고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많은 악한 일을 하고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가 어느 날 양심이 깨어나 문제가 된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양심이 깨어나 자신의 유죄를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양심에 문제가 있을 때 사람은 잘 행하고 선을 행하려고 한다. 사람이 선을 행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양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다. 양심이 당신의 유죄를 보여줄 때 당신은 좀 더 선한 일을 행하고 좀 더 좋은 일을 하려고 할 것이다. 이로써 당신의 양심에 대해 『비록 내가 잘못을 범했지만 선한 일도 많이 행했다. 』고 말하려고 할 것이다. 왜 선을 행하는가? 선을 행함은 양심의 참소가 있기 때문에 양심을 달래고 양심의 참소를 막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사람이 스스로 생각해낸 구원의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것의 근본적인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이는 죄가 당신의 양심 안에만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도 있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의 죄가 양심 안에 있다면 한 번 잘못을 범하고 열 번 선을 행하면 갚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되는가에 있다. 내가 백 번 왼쪽에 주차시켰다고 해서 한 번 오른쪽에 주차한 것에 대한 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양심 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이다. 우리는 양심 안의 죄를 처리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죄도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있는 죄안을 처리한 후에야 양심 안의 문제를 처리할 수 있다. 당신이 자신을 속여서 양심으로 정강을 갖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먼저 처리할 문제는 양심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양심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어쩌면 당신은 양심의 역사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양심에 평안이 없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내가 말하지만, 하나님의 빛이 비췰 때 사람의 양심은 불안해지고 바닥에 구멍만 있어도 들어가고 싶어한다. 그는 양심을 평안하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할 것이다. 자기 목숨으로 자기 죄를 속량해야 한다 할지라도 그는 그렇게 하려고 할 것이다. 유다는 왜 목매달아 죽었는가? 이는 양심이 그를 그냥 놓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를 팔았기 때문에 그의 양심은 그를 통과시키지 않았다.
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사람을 돌같이 불못에 던지지 않으셨는가? 왜 장래에 하나님은 많은 천사들로 하여금 불못을 지키게 하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은 왜 지옥에 대폭동이 있을까봐 두려워하지 않으시는가? 내가 아는 것은, 사람이 죄를 범했다면 지옥은 그에게 있어서 화가 아니라 일종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양심이 사람을 참소하기 시작할 때, 양심은 사람에게 형벌을 내릴 것을 요구하게 된다. 형벌은 하나님의 요구만이 아니라 사람의 요구이기도 하다. 당신이 죄를 보지 못했을 때 당신은 형벌을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죄를 보았을 때에는 형벌을 축복이라고 느낄 것이다. 당신은 살인자가 처형되고 암살자가 처벌되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 죄를 보지 못할 때 살인을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죄를 보았을 때 사형당하는 것을 즐거운 일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은 형벌받는 곳일 뿐 아니라 또한 도피하는 곳이요 영원한 도피를 위한 곳이기도 하다. 양심 안의 죄는 오늘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하고 내세에서는 형벌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분 앞에 있는 우리의 죄를 처리해주셔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양심 안의 죄도 처리해 주셔야 함을 기억하기 바란다.
동시에 죄에는 또한 세번째 방면이 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고 양심 안에 죄가 있을 뿐 아니라 육체 안에도 죄가 있다. 이것이 로마서 7장, 8장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이다. 육체 안의 죄는 무엇인가? 좀 전에 우리가 보았듯이 하나님 앞에는 죄안(罪案)이 있고 양심 안에는 죄의 참소가 있다. 이제 세번째 방면은 육체 안에 죄의 권능과 죄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죄는 죄가 좌정하는 자리를 갖고 있는데, 죄는 어디서 다스리는가? 죄가 육체 안에서 다스린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고 또한 양심안에 죄가 있는데, 이것들은 다 객관적인 것들이다. 하나님 앞에 죄안이 있는 것과 앙심 안의 참소는 죄에 대한 나의 느낌에 불과하다. 그러나 육체 안의 죄는 주관적인 것이다. 즉 죄는 우리로 범죄하도록 우리를 강요하고 밀어대고 격동시키고 재촉하는 능력을 가지고 우리 몸에 거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한 육체 안의 죄이다.
가령 한 형제가 매달 백 원을 버는데 백 오십 원을 쓴다 하자. 그는 빚을 지기를 좋아하고 이것은 그의 성격이 되었다. 돈을 빌지 않으면 손이 가려울 뿐 아니라 머리도 몸도 가렵다. 한 달 월급을 쓰고서 돈을 좀 빌어야만 속이 편하다. 이 때 그에게서 다음의 세 방면을 볼 수 있다. 첫째, 그는 많은 채권자를 만들어내고 채권자 측에서는 건수가 있게 된다. 둘째, 만일 그에게 지식이 없다면 빚진 결과가 어떤지를 모르고 여전히 평강 안에서 빛을 지게 된다. 만일 그에게 빚이 있다면 그의 장래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채권자 측에 죄안이 있을 뿐 아니라 양심 안에서도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뿐 아니라 그에게 또한 육체 안에 죄가 있다. 그가 빛을 진 것이 틀렸을 뿐 아니라, 왠지 돈을 빌지 않으면 속이 편치 않은 것이 있다. 그의 속에는 이 개월 동안이나 빌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빌도록 격동시키고 재촉하는 어떤 것이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육체 안에 죄가 있기 때문이고, 한면으로 죄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안을 갖게 하고 양심 안에 죄가 있게하여 그의 몸에서 하나의 사실이 되게 했다. 다른 면으로 그의 육체 안에는 그로 하여금 계속 범죄하도록 격동시키고 밀어대며 심지어는 그를 끌고 가 범죄케 하는 능력이 있다.
만일 당신이 죄를 저지하지 않는다면 죄의 능력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죄를 저지하면 곧 죄의 능력을 감지하게 된다. 물이 아래로 급히 흐를 때 그 물결을 따라가면 그 물결의 능력을 그리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거슬러 올라간다면 물결의 능력을 감지하게 된다. 중국의 강은 거의 서에서 동으로 흘러간다. 만일 당신이 동에서 서로 가려고 한다면 그 능력을 감지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죄의 능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가장 거룩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죄의 반대편에 서 있고 죄와 맞서 있기 때문이다. 만일 죄와 연결되어 죄를 따라간다면 죄의 능력이 어떤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육체 안에 있는 죄는 당신으로 하여금 범죄하도록 계속 당신을 격동하고 재촉한다. 당신이 깨어나서 그것을 처리하려고 할 때 비로소 당신은 자신이 잃어버린 바 된 죄인이고 멸망할 죄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날 비로소 당신은 자신이 아무런 의지할 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과 당신의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양심의 존재와 하나님 앞에서의 죄안의 문제는 더욱 해결할 길이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이 세 방면을 다 처리해 주셔야 함을 보아야 한다. 내적인 죄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옛사람을 못박으심으로 처리하셨다. . 이것에 대하여는 여러 차례 언급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이번의 성경 연구에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분 앞에서의 우리 죄를 처리하셨으며 우리 양심 안에서의 참소를 해결해 주셨는가에 대해 말할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죄와 죄들의 문제를 언급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죄들은 하나님앞에서의 죄이자 양심 안에서의 죄이다. 성경에서는 죄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와 양심 안에서의 죄를 가리켰다. 그러나 성경에서 육체 안의 죄를 언급할 때에는 죄들이 아닌 죄를 가리켜 말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실지로 완전함을 인해 그분께 감사한다. 하나님은 예수님 앞의 우리 죄를 해결하셨고 주 예수에게서 우리의 죄를 심판하셨다. 동시에 성령은 우리가 주 예수를 영접함으로 양심에 평강을 갖도록 그분의 역사를 우리 앞에 두셨다. 양심이 정결케 될 때 다시는 죄를 느끼지 않게 된다. 많은 때 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주 예수님이 그의 죄를 깨끗케 하셨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한 사람에게 평안하고 즐겁다고 느끼냐고 물었을 때 그는 때때로 죄가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 양심이 깨끗케 될 때 더이상 죄를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이다. 양심 안에서 죄를 느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안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의 죄안이 없어졌는데 어찌 내 속에서 다시 죄를 느끼겠는가? 하나님 앞에서의 죄가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에 양심 안의 죄를 처리해야 하고 더이상 그 죄를 느끼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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